필름카메라

모듈형 중형 카메라의 대표주자, 브로니카 ETRSi

디노상 2025. 4. 4. 13:08

일본의 중형 혁신: 브로니카 ETR 시리즈의 탄생과 발전 역사

1976년, 일본 브로니카(Bronica)는 중형 카메라 시장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왔다. ETR 시리즈의 출시와 함께, 중형 카메라의 대명사였던 하셀블라드에 대항할 수 있는 보다 경제적인 대안이 등장한 것이다. 브로니카는 1959년 니키시 젠조(Zenzaburo Yoshino)가 설립한 회사로, 롤라이플렉스나 하셀블라드 같은 유럽 중형 카메라에 대한 일본의 도전장이었다. ETR 시리즈는 회사의 두 번째 시스템으로, 6×4.5cm 포맷(일명 '645')을 채택했다. 이 포맷은 전통적인 6×6cm 중형 포맷보다 작았지만, 35mm보다는 2.7배 큰 네거티브를 제공했으며, 롤당 15장의 사진을 촬영할 수 있어 경제적이었다. 초기 ETR 모델에서 시작하여 ETRS(1979), ETR-C(1980)를 거쳐, 1989년에는 시리즈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ETRSi가 출시되었다. ETRSi는 이전 모델들의 모든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여러 측면에서 개선된 카메라였다. 특히 향상된 전자 기능, 더 밝은 뷰파인더, 그리고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가 특징이었다. ETRSi는 1999년까지 생산되었으며, 2005년 브로니카가 사업을 중단하기 전까지 회사의 대표적인 시스템으로 남았다. 중형 카메라 역사에서 브로니카 ETR 시리즈, 특히 ETRSi는 모듈형 디자인의 유연성과 접근성을 결합한 상징적인 모델로 평가받는다. 특히 일본 제조사가 유럽의 전통적인 중형 카메라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입지를 다진 사례로, 후지필름 GX680이나 펜탁스 645와 같은 후속 일본 중형 카메라들의 길을 열었다.

모듈화의 철학: ETRSi의 기술적 특징과 시스템 확장성

브로니카 ETRSi의 핵심 철학은 완전한 모듈형 디자인에 있다. 카메라는 바디, 렌즈, 뷰파인더, 필름백, 그리고 다양한 액세서리로 분리되어 있어, 사진가는 특정 촬영 상황에 맞게 시스템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듈성은 특히 상업 사진가들에게 큰 매력이었다. ETRSi 바디는 견고한 금속 구조로, 약 815g의 무게를 가졌다. 전체 시스템(렌즈, 뷰파인더, 필름백 포함)은 약 1.7kg으로, 하셀블라드와 같은 경쟁 모델들보다 약간 가벼웠다. 셔터는 전자 제어식 포컬 플레인 타입으로, 8초부터 1/500초까지의 속도를 제공했다. 카메라 전면에는 그립이 내장되어 있어 핸드헬드 촬영이 용이했으며, 이는 당시 다른 중형 카메라들과 차별화된 특징이었다. 뷰파인더는 교체 가능했으며, 웨이스트 레벨(WLF), 프리즘(AE-II, E-II), 그리고 속도 파인더 등 다양한 옵션을 제공했다. 특히 AE-II 프리즘 파인더는 조리개 우선 자동노출 기능을 갖추고 있어 빠른 촬영 상황에서 유용했다. 필름백 또한 교체 가능했으며, 120 롤필름용 표준 6×4.5 백, 220 필름용 백, 폴라로이드 백, 그리고 6×6 포맷 촬영을 위한 SQ 백까지 다양했다. 렌즈 시스템은 40mm 광각부터 500mm 초망원까지 14종 이상의 Zenzanon-PE 렌즈를 포함했다. 이 렌즈들은 뛰어난 광학 성능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특히 표준 렌즈인 75mm f/2.8은 선명도와 보케 품질이 우수했다. 또한 매크로 벨로우즈, 텔레컨버터, 익스텐션 튜브 등 다양한 액세서리를 통해 시스템의 활용도를 더욱 확장할 수 있었다. 모터 드라이브 SQ-I를 장착하면 초당 2.5프레임의 연속 촬영도 가능했는데, 이는 중형 카메라로서는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ETRSi의 이러한 시스템 확장성은 하셀블라드 500 시리즈에 필적했지만, 가격은 훨씬 합리적이었다. 이로 인해 ETRSi는 전문 사진가와 진지한 아마추어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중형 시스템으로 자리 잡았다.

모듈형 중형 카메라의 대표주자, 브로니카 ETRSi

창의적 실용주의: ETRSi의 사용 경험과 촬영 특성

브로니카 ETRSi의 사용 경험은 견고함과 실용성이 특징이다. 카메라를 처음 손에 들면 그 무게와 견고함이 즉시 느껴지지만, 내장된 그립 덕분에 핸드헬드 촬영도 편안하다. 작동 방식은 상당히 직관적인데, 대부분의 주요 컨트롤이 손가락 닿기 쉬운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필름 장전은 분리형 필름백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는 촬영 중 필름 유형을 신속하게 교체할 수 있게 해준다. 촬영 시 셔터를 누르면 미러가 올라가고 빛이 필름에 도달하며, 이후 필름 감기 레버를 조작하면 미러가 내려가고 셔터가 재설정되는 동시에 필름이 다음 프레임으로 감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러 소리는 상당히 크지만, 많은 사진가들은 이를 중형 카메라 고유의 만족스러운 경험으로 여긴다. ETRSi의 장점으로는 견고한 내구성, 모듈형 시스템의 다재다능함, 뛰어난 광학 품질,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 등이 있다. 특히 측면 그립과 인체공학적 디자인은 핸드헬드 촬영에 큰 강점이었다. 단점으로는 다소 큰 크기와 무게, 상당히 시끄러운 미러 소리, 그리고 최대 셔터 속도 1/500초의 제한 등이 있었다. 또한 완전 전자식 설계로 인해 배터리 없이는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는 점도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ETRSi로 촬영된 이미지는 6×4.5 포맷 특유의 균형 잡힌 화면 비율(약 4:3)과 중형 필름의 풍부한 디테일이 특징이다. 특히 Zenzanon-PE 렌즈의 뛰어난 해상력과 색 재현력은 상업 촬영과 풍경 사진에 이상적이었다. 중형 필름 특유의 얕은 피사계 심도 역시 포트레이트와 제품 사진에서 크게 활용되었다. 브로니카 ETRSi는 특히 스튜디오 사진가, 패션 사진가, 풍경 사진가, 그리고 건축 사진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이는 카메라의 다재다능함과 이미지 품질 덕분이었다.

전문가들의 선택: 유명 사진작가들의 ETRSi 활용 사례

브로니카 ETRSi를 사용한 유명 사진가들 중에는 미국의 풍경 사진가 데이비드 뮨치(David Muench)가 있다. 그는 자연의 장대한 풍경을 포착하는 데 ETRSi의 6×4.5 포맷과 넓은 다이내믹 레인지를 활용했다. 영국의 패션 사진가 닉 나이트(Nick Knight)도 초기 작업 일부에 브로니카 시스템을 사용했으며, 특히 스튜디오 촬영에서 그 시스템 유연성을 높이 평가했다. 일본의 다큐멘터리 사진가 세바스티안 살가도(Sebastião Salgado)는 '노동자' 시리즈 일부에 브로니카를 사용했으며, 사회적 다큐멘터리 작업에 중형 포맷의 디테일과 톤 범위가 가져다주는 가치를 강조했다. 건축 사진 분야에서는 줄리어스 슐만(Julius Shulman)이 때때로 브로니카 시스템을 사용했으며, 특히 ETR 시리즈의 광각 렌즈(40mm, 50mm)가 건축물의 원근감과 공간성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상업 및 광고 사진 분야에서 수많은 무명의 전문 사진가들이 ETRSi를 주력 장비로 사용했다. 그들에게 ETRSi는 하셀블라드나 롤라이플렉스의 더 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인 대안이었다. 이 카메라는 특히 스튜디오와 현장 촬영을 오가야 하는 상업 사진가들에게 환영받았는데, 이는 휴대성과 다재다능함 덕분이었다. 브로니카 ETRSi를 선택한 사진가들에게 공통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뛰어난 광학 품질과 시스템 유연성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했다는 점이다. 하셀블라드와 같은 프리미엄 시스템의 절반 이하 가격으로, ETRSi는 중형 포맷으로 진입하려는 많은 사진가들에게 현실적인 선택지였다. 또한 실용주의적 접근과 강건한 내구성은 실제 작업 환경에서 큰 장점이었다. 이처럼 브로니카 ETRSi는 화려한 이름보다 실질적인 성능과 가성비를 중시하는 사진가들의 신뢰할 수 있는 도구로 자리매김했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가치: 현대 사진에서 ETRSi의 의미와 수집 가치

디지털 혁명이 사진계를 완전히 변화시킨 오늘날에도, 브로니카 ETRSi는 여전히 의미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첫째, 필름 사진의 르네상스와 함께 많은 현대 사진가들이 중형 필름의 독특한 미학적 특성을 재발견하고 있다. ETRSi는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가격과 풍부한 중고 시장으로 인해 중형 필름을 경험하고자 하는 디지털 네이티브 사진가들에게 인기 있는 선택지가 되었다. 둘째, 6×4.5 포맷은 현대 디지털 센서의 3:2나 4:3 비율과 호환성이 높아, 디지털과 필름을 오가는 워크플로우에 적합하다. 셋째, ETRSi의 모듈형 설계 철학은 현대 카메라 시스템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위상원(Phase One)이나 하셀블라드의 현대 중형 디지털 시스템에서 그 유산을 찾아볼 수 있다. 컬렉터 시장에서 브로니카 ETRSi의 가치는 점차 상승하고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상태가 양호한 ETRSi 바디는 약 300-500달러 선에서 거래되며, 75mm f/2.8 표준 렌즈가 포함된 키트는 약 600-800달러 정도에 판매된다. 희귀한 렌즈나 액세서리는 더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특히 40mm f/4 광각 렌즈, 미야비(Fisheye) 렌즈, 그리고 250mm f/5.6와 같은 망원 렌즈는 컬렉터들에게 인기가 높다. ETRSi를 구매할 때 주의할 점으로는 전자 부품의 상태, 필름백의 누출 여부, 그리고 렌즈의 곰팡이나 헤이즈 발생 여부 등이 있다. 특히 노출계가 정확하게 작동하는지, 모든 셔터 속도가 일관되게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고 ETRSi 구매 시 가장 큰 장점은 시스템 구성 요소가 풍부하게 시장에 존재한다는 점으로, 이는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확장하려는 사진가들에게 큰 이점이다.

브로니카 ETRSi가 현대 사진에서 갖는 가장 큰 가치는 "느린 사진(slow photography)"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즉각적인 결과와 달리, ETRSi를 사용한 필름 사진은 계획, 신중한 구도 설정, 그리고 현상 과정까지의 기다림을 포함한 명상적인 과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의도적인 과정은 창의성과 자기 표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촉진하며, 이는 빠른 소비 문화에 대한 중요한 대항담론이 된다. 브로니카 ETRSi는 단순한 빈티지 카메라를 넘어, 모듈형 설계와 사용자 중심 철학의 소중한 사례다. 그것은 화려한 브랜드나 최신 기술보다 실용성과 유연성, 그리고 이미지 품질의 본질적 가치를 상기시키는 존재로,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진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